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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역사 소개

제1차(1824~1826)과 제2차(1852) 영국-버마 전쟁을 거치며 영국은 인도에서 버마로 식민지를 넓혀갔다. 제3차(1885) 영국-버마 전쟁에서 영국은 한 달 만에 수도 만달레이를 점령하고 왕실을 인도의 라트나기리로 추방했다.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소규모의 저항은 1896년까지 계속되었다.

식민지 시대 (1886-1948)

버마인의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시작해, 세계 대공황 이후 젊은 지식층 사이에 퍼졌다. 1930년의 무장봉기는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1937년 인도로부터 분리해 영국 연방 내의 자치령이 되었다. 1942년, 아웅 산이 버마 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싸워 영국군을 몰아냈고, 도하에 있는 버마국 정부에 대해서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 측과 내통하는 양동작전을 벌였다. 연합군이 버마를 탈환하면서 버마국 괴뢰정부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군에 승리했지만, 영국은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고, 버마족은 다시 독립투쟁을 벌여 1948년 버마연방으로 도립을 선언한다. 현 미얀마 군부는 1942년의 버마 독립 의용군 창립을 건군의 기원으로 하고 있다.

버마 민주공화국 연방 시대 (1949-1962)

독립 후, 버마는 바로 정치적 혼란에 빠진다.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소수 종족들은 아웅 산이 약속했던 자치주의 실현을 요구하고, 무장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정권 수립을 주장하여 계속되는 정쟁은 폭동으로 번졌다. 우 누 수상은 공산주의자들을 제도권 내로 흡수하고 소수종족의 자치를 약속하는 등 진정을 위해 노력하지만 연방 분열 불가를 주장하는 군부로부터 불신을 사는 반작용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 아웅 산은 암살되고, 우 누는 불교 사회주의를 주장하며 버마 연방을 통치하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타 종교를 믿는 소수 민족들은 자체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자치주 요구를 넘어 거주지역에서 내전의 양상으로까지 전개된다.

1954년 우 누 수상은 복지 국가론을 주창하며 농지 국유화 등 정책을 펴지만 오히려 경제 위축만 가져오고 실패하고 만다. 부패와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지도력을 상실하면서 여권이 분열하자, 공산당과 꺼인족 반군의 제휴로 내전이 확대되면서 결국 1958년 10월 우 누는 군사령관인 네윈에게 위기관리를 맡긴다. 네윈은 2년 만에 1960년 선거로 다시 집권한 우 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으로 원대 복귀한다. 우 누가 불교 국가화 정책으로 다시 나라를 혼란하게 만들자 소수 민족에 의한 국토의 분할을 용납할 수 없다는 네윈은 1962년 3월 2일 쿠데타 버마민주공화국을 붕괴시켰다.

네윈 군사정권 시대 (1962-1988)

네윈의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서방국가들은 경제제재를 가하지만 네윈은 고립주의 경제로 버틴다. 1983년, 아웅 산 묘지 테러 사건 당시 한국 측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오해하였으나, 사건을 조사한 미얀마 정부가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고 국교를 단절함으로써 오해는 해소되었다. 아웅 산은 버마(미얀마) 독립의 영웅으로 대단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기에, 미얀마에서는 북한을 대대적으로 규탄하는 움직임도 일어나기도 하였다.

네윈은 1988년까지 군사 독재체제를 유지했지만, 경제정책의 실패로 버마의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1988년 군부의 독재에 대항해 일어난 시위에 군부가 유혈 진압으로 대응해 3,000여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10,000여 명이 실종됐다. 그래도 8888항쟁의 결과로 네윈이 실각하고 사회주의가 철폐되면서 잠시 민주화의 바람이 불며 1990년에 총선이 치러지기도 했다. 그러나 1988년 9월 18일 다시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제2의 군사독재 시대를 열어간다.

미얀마 연방공화국 시대 (1988-현재)

신군부의 총선거 공약에 따라 전국에서 수백 개의 정당이 생기는 가운데 신군부는 국민통일당을 조직해 체제를 유지했다. 1989년 국가명도 버마에서 미얀마연방공화국 (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으로 바꾼다. 당시 독립영웅 아웅 산 장군의 딸인 아웅 산 수치 등은 민족민주동맹(NLD)을 결성했지만, 총선 전인 1989년 7월 20일에 가택연금 되었다. 이후, 그녀는 장기 연금과 해방을 반복해 겪었다.

1990년 5월의 총선거에서는 NLD와 민족 정당이 압승했지만, 군정은 선거 결과에 근거하는 의회 소집을 거부해, 민주화 세력의 탄압을 강화했다. 의원 당선자 일부는 탈출해 망명 정권으로서 버마 연방 국민연합정부(NCGUB)를 수립했다. 군사 정권은 1994년부터 2007년에 걸쳐 신헌법 제정을 향해서 기본 원칙을 심의하는 국민 회의를 단속적으로 개최해 왔다. 2006년 10월 양곤과 만달레이 사이에 새로 건설한 행정 수도 네피도로 천도를 완료했다. 2007년 9월 석유 가격 인상을 이유로 불교 승려들이 시위를 벌이자 참가자가 수 만 명 규모로 늘어났다. 군사정권의 무력 진압으로 일본인 저널리스트 나가이 겐지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2008년 5월 개헌 국민투표로 민주화 운동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다.

2010년 2월 13일, 정부는, 최대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의 틴 우 부의장의 가택연금(2003~ )을 해제했다. 이틀 후 UN 인권이사회의 킨타나 특사가 미얀마를 방문해 아웅 산 수치와의 면회를 요구했고 결국 11월 13일, 가택연금이 해제됐다. 2012년 보궐선거에서 NLD는 압승을 거두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국회 의석은 여당 소유였다. 2015년 총선에서 국민민주연맹이 상하원의 과반수를 넘는 수의 의석을 차지해 첫번째 민주 정부가 구성되었고, 떼잉 세인 대통령은 점차적인 민정이양을 약속했지만 시늉일 뿐이었다. 미얀마 헌법상 미얀마군 통수권자는 미얀마군 스스로 임명한 총사령관이고, 대통령과 총리는 군부에 명령할 권한이 없다. 특히나 미얀마에 자유선거를 재도입하는 과정에서 만에 하나 있을 개헌을 막기 위해 개헌을 저지할 만한 의석 25%를 군부가 임명한다. 심지어 미얀마는 헌법 40조에서 비상사태시 군 총사령관에게 권력을 인계할 수 있다고 명시해 아예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조항까지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미얀마 군부는 정치권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할 때마다 반발하고 쿠데타 위협을 가하여 정부를 하수인으로 삼아 사실상 군부독재 체제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2015년 총선에서 승리했음에도 군부에 막혀 사실상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NLD는 2020년 초반 개헌을 시도하지만, 군부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했다. 오히려 군부에서 추진한 로힝야족 인종청소 때문에 미얀마 정부가 그 비극을 방조한다고 국제적인 비난을 받기에 이른다. 미얀마 군부의 지속적인 독재와 부정부패에 지친 미얀마인들은 2020년 11월의 총선에서 NLD에 선거 가능한 75% 의석 중 무려 83.2%를 몰아주어 의회 총원의 62.4%를 확보하게 만들어주었다. 정부는 이 힘을 바탕으로 1월 5일, 군부에게 25%의 의원을 할당해주는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였지만 군부는 결국 군부는 권력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무력으로 뒤엎기로 결심한다.

결국 2021년 2월 1일,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의 군부는 2020년 11월 총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과거 무자비한 탄압을 경험한 기성세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미얀마의 불안정했던 민주주의 정권은 5년 만에 무너졌다.

미얀마의 봄 (2021)

쿠데타에 성공한 미얀마 군부는 1년간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인터넷과 전화, 통신을 새벽 5시부터 11시까지 차단하고, 은행의 영업도 금지시켰으며 국제선 항공은 물론 주요 도시로 향하는 도로도 모두 차단시켰다.

시민들이 유혈진압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군부는 거리낌 없는 쿠데타 실행 이후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명령하면서 다수의 희생이 발생했다. 두달 반이 지난 현재 언론들의 취재가 거의 봉쇄된 가운데에서도 보고된 사망자만 700명이 넘는데, 희생자 중에는 5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조준사격에 의한 총살과 즉결처분, 주택에 무단침입해 구타 및 체포하고 불법감금과 고문, 실종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반인권적 범죄로 국제적인 지탄을 받고 있다. 쿠데타 직전과 직후 중국은 시진핑 주석과 왕이 외교부장이 차례로 미얀마를 방문해 쿠데타 배후에 대한 의심을 키웠다. 원래 미얀마 정부는 아웅 산 수치의 총선 승리 이후 서방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군부의 로힝야 인종 청소로 인해서 지원이 거의 끊긴 상태였다. 이로 인해 미얀마 정부는 중국에 접하고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협조해 미얀마 항구에서 중국 윈난성으로 연결하는 송유관과 가스파이프를 건설했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중국이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민병대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조달해준다는 의심을 하고 있었고 중국에서 미얀마를 사실상 속국으로 취급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며 러시아에 접근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중국과 러시아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을 좋지 않게 보면서 UN 안보리에서 군부의 편을 들고 있어 UN 평화유지군 파견에 제동을 걸고 있다.

3월 29일 미얀마 군의 날 행사에서 러시아와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베트남, 라오스, 태국 대표가 참석하면서 사실상 군부의 쿠데타를 지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특히 서로 사이가 별로 안 좋은 데도 불구하고 한뜻으로 뭉쳤다는 데서 미얀마의 완전한 민주화가 각국의 독재정권에게는 악재임을 알 수 있다. NLD 등 반군부 세력은 쿠데타 반란군에 대항해 국민의회 대표위원회(CRPH)를 결성하고 세력을 모으며 UN에 파견한 사사 특사를 통해 국제사회의 반 쿠데타 연대를 호소했다. 그러나 동원할 무력이 없어 무력하게 군부의 살상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들은 4월 1일, 소수민족과 반군들을 포함한 통합 정부를 구성, 본격적으로 내전을 시작했다. 내전이 격화되면서 수많은 난민이 발생해 미얀마는 더욱 혼란과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의 젊은이들과 불교 승려들은 이번에도 꺾일 수 없다며 죽음을 불사하고 시위에 나서고 있으며, 미얀마 시민들은 소리 나는 물건을 두드리며 응원을 보낸다. 그러나 양곤과 만달레이 등지에 투입된 로힝야 학살부대는 오늘도 만행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군부 대변인은 시위대를 향해 머리에 총을 맞게 될 것이라는 협박도 서슴지 않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절박하게 외치는 미얀마 민주화운동 시위대를 위해 세계의 시민들이 미얀마는 외롭지 않다고 응답하며 나설 때가 바로 지금이다.